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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연화지에 숨은 사연

기사승인 2020.01.29  20: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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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적인 벚꽃 名所 만든 이들의 땀과 눈물 잊지 말아야”

 김천시 교동에 가면 연화지라는 연못이 있다. 벚꽃 피는 봄이면 전국의 상춘객들이 몰려오는 벚꽃의 명소다.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전국 벚꽃 10境중 하나로 소개한 책자도 본 것으로 기억된다.

조선 시대 초 농업용수를 위해 조성되었던 저수지로 물이 맑고 경관이 좋아 풍류객들이 못 가운데 섬을 만들고 봉황대라는 정자를 지어 풍류를 즐겼다. 이후 농업 관계시설의 기능이 상실되었다가 1993년에 김천시가 29.372㎡(8,885평)에 석축 조경과 화장실, 평의자 등의 시설을 마련한 시민 휴식 공간으로 조성했다.

조선조 문신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1445-1494)이 지금의 교동 연화지를 노래한 시(詩)가 전해져 온다.

金陵佳塵地 一沼貯情波 (금릉가진지 일소저정파)

금릉 아름다운 땅, 맑은 물결이 일렁이네

得所錦鱗物 琦風楊柳斜(득소금린물 기풍양류사)

물속에 비단비늘이 가득하고 바람에 수양버늘이 나부낀다

벽지삼만개 홍견십장화 碧知三萬盖 紅見十丈花

푸른 것은 삼만개의 연잎이요 붉은 것은 열 길의 연꽃이네

勝槩非吾分 征輪獨此過(승개비오분 정륜독차과)

좋은 경치를 감상함은 내 분수가 아니라 떠나는 수레타고 홀로 이곳을 지난다네
 

많은 연꽃이 있어 못의 이름이 연화지라면, 한자 표기는 당연히 연꽃 ‘연’과 꽃 ‘화’로 ‘蓮花池’라 해야 할 것을 시에는 ‘연화지(鳶嘩池)’다. 바람에 날리는 ‘연’의 의미도 있고, 솔개를 뜻하는 ‘연(鳶)’자에, ‘바뀌다’라는 의미의 ‘화(嘩)’자를 쓰고 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안내문에 의하면, 1707년 당시 군수였던 윤택(尹澤)이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서 이름을 ‘연화지(鳶嘩池)’라 지었다는 설명이다.

연화지 안에 봉황대라는 정자가 있는데,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현재 법원 자리에 ‘읍취헌(邑翠軒)’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꿈에서 솔개가 변한 봉황이 그 쪽으로 날아오르자 그 이름을 ‘봉황대’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과, 1771년 김항주(金恒柱)라는 군수가 연화지 북쪽 구화산에 있던 정자를 산 밑으로 옮기면서 봉황대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183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내용은 서로 일치한다. 1792년에 이성순군수가 개수하고 1838년에 군수 이능연이 연화지 못 가운데로 옮겼다.1896년에 윤헌섭군수가 성금을 모아 중수하고 1978년에는 김천시에서 시비 7백만원으로 개수했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애초에 연화지는, 조선 초기에 농업용수 관개용으로 조성되었다는데, 1707년 당시 윤택(尹澤) 군수가 꿈을 꾸고 ‘연화지(鳶嘩池)’로 한자 개명하기 이전에는 이곳을 연꽃이 있는 못이라는 이름의 ‘연화지(蓮花池)’라고 한자 표기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유호인은 그 연화지를 노래했을 것이고...


사람들은  아름다운 벚꽃만 기억하지만 여기엔 많은 이들의 노력과 눈물, 땀이 배어져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박광화 翁

연화지를 둘러싼 벚나무의 잎사귀가 물들고 못의 연대(蓮줄기)가 쓰러져가는 가을 날 연화지에 담긴 사연을 듣기 위해 박광화 翁을 만났다. 이 분은 연화지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다. 공무원들은 “못지킴”이라는 별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연화지의 아름다운 벚꽃이 예전부터 있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 현재의 연화지는 박광화 초대 금산동 시의원과 교동.금산동 새마을 지도자와 부녀회를 비롯한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물이다.

              1992년의 연화지 전경

               1992년의 연화지 전경

관개시설로 이어져 오던 연화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연못으로의 물의 유입이 막히고 각종 오폐수가 모인 냄새나고 썩어가는 물로 방치되어 있었다.

1992년과 93년에 걸쳐 박광화 초대 금산동 시의원의 노력으로 총 시 예산 3억원이 투자되어 생활오폐수 관로를 매설해 분리하고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썩은 연못바닥의 흙을 준설했다. 새로운 물을 공급하기 위해 직지천에서 물을 끌어올 수 있는 배관도 새로 깔았다.

못 주변에는 사철나무와 쥐똥나무등을 구해다 심었다. 비용이 없어 공사로 버리는 나무들을 얻어왔고 ,현재 아름다운 꽃을 뽐내는 벚나무는 직경 5cm를 시청에 요구했으나 예산문제로 직경 3cm 짜리를 심기도 했다. 주변의 학생과 아이들이 어린 벚나무를 꺽거나 가지를 찢으면 새벽에 나와서 노끈으로 묶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로등도 돈이 없어서 뜨문뜨문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 가평까지 가서 수초를 먹고 자라는 草漁라는 물고기를 50수 무상으로 구해 와서 못에 풀어놓기도 했다. 이 고기는 1m까지 자라는데 철없는 사람들의 낚시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정비작업과 나무 이식 작업에는 교동과 삼락동의 통장과 부녀회장 새마을지도자들이 함께 했다. 박광화 翁은 무보수 명예직인 통합초대 시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들여 주민들과 국수를 삶아 식사를 대신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45세부터 김천시 자문위원과 시의원을 거치면서 연화지를 복원하고 법원과 검찰청을 이전하는 등 고향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지역의 발전위원들이 각 동의 자발적인 찬조로 공덕비를 연화지에 세우기도 했다.지금의 건화호반맨선 앞쪽이다. 하지만 지금 이 공덕비는 언론의 비판과 여러 가지 이유로 인근 풀밭에 방치되어 있다.

박광화 翁은 지금 연세가 우리나이로 90으로 알고 있다. 지금의 연화지가 있기까지 그의 공적은 간과하기 어렵다. 물론 사람이 살면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김천의 역사로 기록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지금의 연화지는 박광화라는 김천시군통합 초대시의원의 각고의 노력과 교동.금산동 주민들의 수많은 눈물과 땀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엄연한 진실이다.

자신의 노력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기꺼워하는 사람은 성인이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공덕비가 번듯하게 원래 자리에 세워져 있진 못할지라도 이제 인생을 정리할 시기의  老정치인이 풀밭에 두껑이 깨진 채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공덕비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이 되는가?

연화지는 이제 김천을 너머 경북 더 나아가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다. 그 화려함 속에 녹아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대단한 보상을 해주진 못할 찌라도 조그마한  비석이라도 하나 연화지에 세워 그 노력에 감사하는 마음과 연화지의 역사로 후손들에게  남겨주면 그것도 김천을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연화지를 찾는 외부의 관광객들에게도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김천이 발전하려면 가치 있고 좋은 것은 아름답게 , 조금 불편하거나 잘못된 사실도 있는 그대로 기록해 후대에  전함으로써 후손들이 金泉人으로써의 더 많은 발전과 자긍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의무일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연화지 복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광화 翁은 조상께서 연산군 시절 화를 피해 배처이 마을로 내려와 500년을 살아왔고 부친이 고종 말 정3품(차관)벼슬을 지낸 마을의 유지로 선조의 역사와 고향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더 쌀쌀해지기 전 가을이 물드는 연화지에서 숨겨진 역사를 반추하며  깊어가는  晩秋를 즐겨보시는 건 어떠실지...

  

#김천황악신문 #교동 연화지

 

 

 

 

 

김천황악신문 webmaster@hwang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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