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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와 榮光을 뒤로 하고 쓸쓸히 사라져간 갈항사(葛項寺)

기사승인 2020.07.03  15: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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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의 문화와 유산을 찾아서 17)

" 돌 해골을 상대로 시작한 설법으로 화엄의 사상이 꽃핀  불교聖地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김천과 구미를 경계 짓는 위대한 금오산 서쪽 노적봉 밑 칡넝쿨 우거진 산기슭에 한 승려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승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말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학의 3대조인 법장에게서 배우고 의상에게 전하는 편지를 가지고 온 유학파 고급 두뇌의 소유자다.

신라로 귀국한 후 의상대사에 문하에 들어갔지만 그는 푸대접을 받았다. 요즘말로 비주류였던 것이다. 의상의 10대 제자에도 끼지 못하고 참담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한탄하던 승전은 수도 서라벌을 떠나 지방의 촌구석 개령군(현재의 김천시)에 절을 짓고 돌을 깍아 사람의 형상을 만든 해골을 앞에 두고 설법을 시작했다. 고려 후기까지 돌 해골 80개가 갈항사 주지에게 전해져 왔다. 돌 해골을 제자로 삼아 화엄경을 강의한 갈항사, 당나라에 유학해 화엄의 요지를 배워왔으나 주류에서 소외되었던 한 남자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금오산 서쪽 기슭에 칡넝쿨로 얼기설기 지어 만든 절이 갈항사의 시작이었다.

             보물 제245호 갈항사지석불좌상

새로운 화엄의 교리를 배워 귀국했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시름과 울분을 달래며 돌을 중생으로 삼아 설법하던 승전과 갈항사의  흔적은 지금 풀 속에 잠들어 있다.

2000년 갈항사에서 중창불사를 위해 땅파기 공사를 하던 중에 대형 석물 18점이 발견되어 대구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승전이 화엄경을 설한 ‘돌 해골’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승전은 700년대 초에 법장의 통합불교를 지향하는 화엄종을 처음으로 신라에 들여온 승려였고, 갈항사는 신라 중대 말, 신라의 불교사상과 진골귀족 및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 주목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초라한 절이 세워진 50년 후에 통일신라 원성왕 외가에 의해 두 탑이 세워지며 중창되고, 다시 30년 뒤 원성왕대에 탑에 명문이 새겨지며 새롭게 중창되어 갈항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우물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9 ‘불우(佛宇)’에 보면 갈항사에 대한 기록이 있어 조선 중기까지는 사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갈항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갈항사는  8세기 중엽에 이르러 가문의 일원이 왕위에 오를 정도의 최고 귀족 집안 원찰(願刹)로 대단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국보 99호 갈항사 삼층석탑

지금은 풀밭으로 변한 절터에 보물 제245호 갈항사지석불좌상과 비로자나석불좌상 1구 신장상이 부조된 석재가 남아 있으며, 3층 석탑 2기(국보 제99호)는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1916년에 유물을 탐낸 도굴꾼들이 두 탑을 무너뜨리자 일제가 두 탑을 경복궁으로 옮겼다고 한다. 국보 제99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옮겨져 자리를 잡았다. 1916년에 탑을 해체할 때 기단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동ㆍ서탑에서 각각 청동제 항아리와 금동제 병이 1점씩 출토되었다. 이 사리장치는 현재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중이다.

갈항사 삼층석탑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두 탑은 천보17년 무술년에 세웠다. 남매 3인이 업으로써 이루었는데 남자는 영묘사의 언적법사이며 매자는 조문황태후이고 매자는 경신대왕의 이모이시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천보17년은 경덕왕 17년(758)으로 원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조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로 박씨인데 계조부인 혹은 지조부인이라 한다. 언적법사는 원성왕의 외삼촌이다. 이 탑은 원성왕의 외가인 박씨 일가들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갈항사 중창은 삼층석탑을 세운 시기와 탑에 명문을 새긴 시기, 총 2차례에 걸쳐 이루진 것이다. 탑의 글씨는 탑이 건립되고 30~40년이 흐른 뒤 원성왕이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새긴 것이다.

통일신라 원성왕과 그 직계 후손이 왕위를 이어가는 동안 갈항사는 최고의 융성기를 누리며 대사찰로 번성했고, 조선 중기까지는 절의 세력이 이어졌지만 숭유억불과 각종 전란을 거치며 폐허가 되어 황량한 풀 속에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

갈항사를 찾는 것은 김천의 많은 문화재가 그렇듯이 쉽지는 않다. 승용차로 가려면 두가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아차하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고, 새 차라면 긁힐 수 있다.

                연대를 알 수 없는 비로자나불 ,佛頭를 새로 붙였다.

갈항마을 끝 좁은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보물 석조여래좌상과 두상을 새로 만들어 붙인 비로자나불을 만나뵐 수 있다. 금오산 뒤쪽의 풍경은 압권이다.

예로부터 김천에서 금오산을 바라보면 그 형국이 나락을 쌓아 놓은 형상이라 해 노적봉이라 불렀다.

지금은 개인소유인 갈항사는 중도 없는 초라한 절이다. 이름만 갈항사지 예전의 흔적은 전혀없다.

땅의 여주인은 나이가 80이다. 기자를 만나 올해부터 길의 풀을 칠 힘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하소연했다 김천시에 가서도 이야기를 한단다. 구미에서 56년 전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했다.

김천의 문화유산을 제대로 보존하고 알리려면 김천시 행정조직의 개편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재를 담당하고 있는 곳은 문화홍보실의 문화재관리계다. 소속 공무원들은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올해에 펴낸 “김천의 문화재”란 책도 유용하다. 하지만 현재의 인력과 비용으로는 김천의 문화재를 제대로 정비하고 관리하기는 냉정히 말하면 불가능하다고 본다.

김천의 문화재를 찾아다니다 보면 표지판이 없는 곳과 안내판이 없는 곳도 많다.

김천의 문화재를 제대로 보려면 좀 과장하면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길을 헤매야 하고, 차량의 바퀴가 빠져서 고생해야 한다.  안내판의 글자가 단 한자도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담당자가 너무 자주 바뀐다는 것이다. 김천이 진정한 스포츠.문화관광도시로 발전하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문화의 영역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문화홍보실의 문화재관리팀을 관광진흥과로 편입시켜 확대 개편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문화와 관광이 분리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막대한 금액을 들여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라져 가는 것을 복원하고 보호 유지하는 것과 역사적 근거를 찾고 스토리텔링의 결합위에서  진정한 문화관광 산업이 꽃피울 수 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문화와 관광의 융합을 이룰 인재의 육성이다. 1년 만에 부서의 책임자가 이동하는 현재의 구조로는  산업으로서의 문화를  얘기하는 것은 무리다.

문화재 관련 일들이 공무원 세계에서 좋은 부서는 아닌 걸로 알고 있다. 일도 많고 민원도 많은데 1년 있을 자리에 굳이 죽어라 열심히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원자를 받아 키우고 인센티브를 줘야한다. 유능한 인재가 서로 오려고 해야 발전이 이루어질 것 아닌가? 지원자에겐 전문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필요하다면 외국이라도 벤치마킹을 위해 보내야 한다.

김천이 진정한 문화산업을 지향한다면 말이다.


#김천황악신문 #갈항사

김서업 대표기자 hwangaknews@hanmail.net

<저작권자 © 황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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