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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새긴 보살은 풍화되지만,민초의 땀과 눈물 1000년의 세월에도 고스란히 남아

기사승인 2023.09.02  20: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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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의 문화재 12] 어모면 은기리 마애반가보살상(殷基里磨崖半跏菩薩像)

난함산

김천에서 새로난 신작로를 타고 상주로 10여분 정도 가면 왼편에 길게 뻗은 큰 산이 있다. 바로 난함산이다.

난함산(卵含山)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란 의미다. 김천을 대표하는 산 중에 하나다.

한때 사드배치 후보지로 검토되기도 했다.

난함산을 배경으로 은기리가 있다. 새로 길이 나기 전에는 동좌리에서 철길을 넘어서 갔지만 지금은 새로 난 국도로 접근성이 좋아졌다.

은기리 입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들이 서 있다. 국도 확장공사로 많이 잘려져 나갔다.

은석마을에 들어서면 쉼터 옆에 돌로 만든 큰 멧돌이 있다.

은기리 은석마을 성황당

길 반대편에는 느티나무와 돌로 만든 성황당이 보존되어 있다.

은석(銀石)마을은 근처의 바위가 은색을 띠고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지금은 발음이 변해 인수골로 불린다,

은석골 좌측 갓골저수지 입구 우측 바위에 반가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 4미터,폭 8미터의 자연암벽을 이용했다.  머리에는 세 개의 산을 형상화한 삼산관(三山冠)이라는 보관을 썻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쳤다.

오른손은 손등을 위로 해 무릎위에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해 왼쪽 무릎위에 놓았다.

사각진 얼굴에 눈은 가늘고 코는 굳세고 귀는 길다. 연화대 위에 오른발을 왼발에 얹은 반가의 모습이다.

반가부좌를 취하면서 여래상의 형식을 띤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 초기불상으로 추정된다.

1000년을 세월을 지나오면서 바위색은 때가 끼어 까맣게 변했지만 보살상의 위엄은 여전하다.

은기리 마애반가보살상

이 불상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눈을 감고 상상해 봤다.

통일신라가 말기적 증상을 보이자 각지의 장군들이 군사를 일으켜 왕이라 칭했다. 세상은 혼란했고 민중들은 살길을 찾아야 했다.

난리를 피하고 안녕을 기원하던 일단의 사람들은 봉황이 알을 품은 명당인 난함산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었다. 승려들도 들어와 절터를 닦고 부처의 가피를 기원했다.

먹고 사는 최소한의 생존마져 위협받던 혼란의 시대!

건물을 제대로 세우기도 힘들었고, 번듯한 불상을 모시기도 쉽지 않았다. 민초들은 묘함산 계곡 옆에서 부처를 새기기 좋은 바위를 발견했다.

절집에서 5리 남짓한 거리였다.

나무로 사다리를 만들고 징과 망치로 부처를 새기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척박한 산을 개간해 보리를 심고, 시간이 남는 대로 부처를 조각하는데 몰입했다.

보관을 만들고 부처의 얼굴을 쪼아 새기고, 손을 만들고 반가부좌의 보살이 완성 될 무렵 바깥 세상은 왕건이라는 인물이 전국을 통일하고 신라의 왕은 고려에 귀부했다.

세상은 서서히 안정되어 갔지만 난함산 속의 사람들은 세상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의 삶을 이어갔다.

은동폭포

반가보살상 앞에서 내려다 보면 폭포가 하나 있다. 시원한 물줄기가 일품이다. 수십미터 암반 하나로 이루어진 마을의 명물인데 1992년 갓골 저수지 공사때 도로를 확장하면서 반이 없어졌다. 그래도 볼만한다.

폭포위로 더 올라가면 산봉우리가 있고 그 정상에 태봉이 있다. 김천에는 직자사 대웅전 뒤에 조선2대 왕인 정종의 태실이 있었고, 지례 궁을산에 효종 두 공주의 태를 묻었던 태봉이 있다. 누구의 태봉인지는 모르지만 명칭으로 봐서는 조선시대 왕족의 태봉일 가능성이 있다.

봉항마을 입구 느티나무 노거수

다시 내려와 큰길로 조금 올라가면 봉항마을이 있다. 난함산 봉황의 목에 위치했다고 봉항(鳳項)마을이다.

길 옆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이 마을의 역사를  증명한다.

봉항마을은 살기좋은 마을에 여러 번 선정된 전국적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김천의 마을 중 구성의 복호리와 함께 풍경이 가장 멋지다.

2009년 행안부가 주최한 살기 좋은 마을에서 전국의 1029개 마을 중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은기리 마애반가보살상

우마차가 다니던 길은 신작로가 들어서고, 마을 앞에 넓은 새 국도가 생겼다.

사람들이 경치 좋고 물 좋은 동네를 찾아 들어와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물은 푸르고 공기는 상쾌하다.지금은 차가 자유롭게 마을을 오가지만 1000년 전 은기리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오지중의 오지였다.

그곳에 마을을 개척하고, 절집을 만들고 높은 절벽에 부처를 새긴 사람들의 노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노동이었을 것이다.

봉항의 알을 품은 성스러운 산위에는 차로가 뚫리고 거대한 통신탑이 들어섰다.

눈물과 땀으로 돌에 새긴 보살은 풍화로 서서히 사라져가도, 부처의 가피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소망하던 민초들의 정성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황악신문 #은기리 마애보살반가상

 

 

영남스토리텔링연구원 ksu3827@naver.com

<저작권자 © 황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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